
2019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특별 심사위원상을 동시에 받으며 화제를 모은 허니랜드는 마케도니아 출신 감독 타마라 코테프스카와 류보미르 스테파노프가 만든 다큐멘터리입니다. 북마케도니아 외딴 산악 지대에서 홀로 어머니를 돌보며 전통 양봉을 이어가는 여성 하티제 무라토바의 삶을 담은 이 영화는, 허니랜드가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를 허문 방식, 하티제의 삶이 말하는 것, 자연과 인간의 균형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왜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오른 것을 넘어 국제영화상 후보까지 함께 올라간 최초의 작품이 됐는지, 그리고 이 조용한 영화가 왜 지금도 회자되는지 살펴봅니다. 3년간 400시간을 촬영해 87분으로 압축한 이 작품은 하티제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자연과 인간, 탐욕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보편적 질문을 던집니다.
허니랜드, 다큐와 극영화 경계를 허문 방식
허니랜드를 다큐멘터리라고 설명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면이 너무 아름답고, 장면 구성이 너무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두 감독은 하티제와 함께 3년을 보내며 400시간이 넘는 분량을 촬영했고, 그중에서 87분을 골라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이미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특정 장면을 위해 기다리고, 빛을 읽고, 인물의 감정이 화면에 담기는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이 극영화의 촬영 방식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티제가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장면들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연기를 피워 벌을 진정시키고, 맨손으로 벌집을 들어 올리는 그 행위가 너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서 이게 연출된 것인지 그냥 일어나는 일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두 감독은 바로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유지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가진 날것의 감각과 극영화가 가진 시각적 완성도를 동시에 붙들려했고, 그 결과가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와 국제영화상 두 부문 동시에 후보로 올린 이유였습니다. 같은 영화가 두 부문에 동시 후보가 된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다큐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계속 이게 정말 다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티제가 혼자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 돌아올 때 뒤에서 잡은 롱숏 같은 건 감독이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렸을 텐데, 그럼에도 연출된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움이었겠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피사체가 카메라를 잊게 되는 순간이 오고, 그 순간을 담은 게 이 영화라는 걸 보는 내내 느꼈습니다.
하티제의 삶이 말하는 것
하티제 무라토바는 북마케도니아 산악 지대의 거의 폐허가 된 마을에서 눈이 먼 노모와 단둘이 삽니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으며,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합니다. 그는 전통 방식으로 벌집을 관리하며 꿀을 얻는데, 항상 절반은 벌을 위해 남겨두고 절반만 가져간다는 원칙을 지킵니다. 이 단순한 원칙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됩니다. 영화 중반, 유목민 가족이 마을 근처에 정착하면서 이야기가 바뀝니다. 남편 삼은 빠르게 돈을 벌기 위해 무리하게 꿀을 채취하다가 결국 벌 떼를 망가뜨리고, 그 여파가 하티제의 벌집에도 미칩니다. 이 갈등 구조가 이 영화를 단순한 자연 다큐멘터리와 구분짓는 핵심입니다. 하티제는 삼에게 반만 가져가야 한다고 거듭 말하지만 삼은 듣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지속 가능성을 포기하는 이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영화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하티제의 삶 자체도 이 영화의 핵심 서사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도시로 가지 않았고, 그 선택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영화 안에서 직접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솔직함이 이 인물을 단순한 다큐 피사체가 아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하티제가 혼자 밥을 먹는 장면, 어머니에게 말을 걸다가 대답이 없자 혼잣말을 이어가는 장면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사람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화면에서 느껴졌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3년이라는 시간이 쌓인 덕분이었을 겁니다. 감독들이 그냥 찍으러 간 게 아니라 거기서 같이 살았기 때문에 이런 장면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보고 나서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균형이 말하는 것
허니랜드의 절반은 벌을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원칙은 단순한 양봉 기술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하게 전달하는 메시지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지속 가능성, 탐욕이 만들어내는 결과. 이 주제들이 거창하게 선언되지 않고 하티제의 손과 벌집과 꿀을 통해 전달됩니다. 삼 가족이 무리하게 꿀을 채취한 뒤 벌 떼가 공격적으로 변하고 결국 가축에게 달려드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도 연출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카메라에 담긴 것입니다. 자연이 경고를 보내는 방식, 그 경고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가 화면 위에서 그대로 펼쳐집니다. 영화 말미에 하티제가 혼자 남겨지는 과정도 이 주제와 연결됩니다. 삼 가족은 결국 떠나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납니다. 하티제는 다시 혼자가 됩니다. 그 고독이 슬프면서도 어딘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 영화가 그 고독을 비극으로 프레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 사람의 삶이 이렇다는 걸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벌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듯, 하티제도 그 리듬 안에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절반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절반은 남겨두는 것, 그 단순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됐는지를 삼 가족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 설교 없이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울림이 클 수 있다는 걸, 이 영화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있는 것을 담았을 뿐인데 그 담음 안에 이렇게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게 허니랜드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