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2011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감독의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철학자 니체가 마부로부터 채찍질당하는 말을 붙잡고 울었다는 일화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니체가 아니라 그 일화에 등장한 말과 마부 그리고 마부의 딸이다. 6일간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역순으로 펼쳐지듯 진행된다. 이동진 평론가가 별 다섯 개를 주면서 여전히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영화다. 이 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적은 것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말하는지, 반복이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벨라 타르가 이 영화로 무엇을 마무리했는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타르코프스키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 헝가리 감독의 은퇴작이 이런 영화라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은퇴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완전히 옳았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벨라 타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토리노의 말, 반복이 말하는 것
토리노의 말에서 마부 부녀의 하루는 거의 같다. 아침에 일어나 술을 마신다. 우물에서 물을 떠온다. 감자를 삶아 먹는다. 말을 돌본다. 잠에 든다. 이 반복이 6일에 걸쳐 이어진다. 그런데 그 반복이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말이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우물이 마른다. 바람이 거세진다. 불이 꺼진다. 빛이 사라진다. 이 미세한 변화들이 이 영화의 드라마다. 벨라 타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대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화면이 두 사람의 일상을 그냥 따라간다. 그 따라감이 이 영화에서 관객을 이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미하이 비그의 음악이 이 영화 전체에 걸쳐 같은 주제를 반복한다. 그 음악이 이 영화의 공기다. 숨 막히고 아름다운 그 공기 안에서 이 부녀가 살아간다. 이 음악이 이 영화에서 대사를 대신한다. 말이 필요 없는 이유가 이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이 영화의 시간이 쌓인다. 그 쌓임이 이 영화의 감각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딸이 감자를 손으로 집어 먹는 장면이 가장 오래 남는다. 아무 말 없이 뜨거운 감자를 천천히 먹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다. 삶이 이 장면 하나에 담겨 있다. 살기 위해 먹는다. 먹기 위해 산다. 그 순환이 이 영화의 전부이고 동시에 이 영화가 말하는 모든 것이다. 벨라 타르의 롱테이크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적 선택이다. 한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관객은 이 부녀의 삶 안에 함께 있게 된다. 그 함께 있음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특별한 경험이다. 대사도 없고 사건도 없지만 무언가가 전달된다. 그 전달이 이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로 가능한 가장 순수한 경험임을 이 영화가 증명한다. 벨라 타르의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매우 도전적이다. 그런데 그 도전을 견디고 나면 이 영화가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받은 사람만이 이 영화가 왜 위대한지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대함이 화려함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가 보여준다. 가장 적은 것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방식, 그게 벨라 타르 영화의 언어다. 이 언어를 배우는 데 이 영화가 필요하다.
6일이 의미하는 것
토리노의 말의 6일 구조가 창세기의 역순이라는 해석이 있다.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6일 동안 세상이 끝나간다. 빛이 꺼지고, 물이 사라지고, 불이 꺼진다. 이 역전이 이 영화를 묵시록처럼 읽히게 만드는 이유다. 그런데 벨라 타르 감독 자신은 이 영화가 묵시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이 영화 안에서 동시에 가능하다. 일상이 종말일 수 있고, 종말이 일상일 수 있다. 마부 부녀에게 이 6일이 세상의 끝인지, 아니면 그냥 살아온 방식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 모호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다. 니체의 일화로 시작하지만 이 영화에서 니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무너진 자리에서, 아무것도 아닌 마부와 딸이 그냥 산다. 그 살아감이 어떤 철학보다 더 무겁다는 것,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철학자 옆에서 신과 무관하게 감자를 먹는 사람들. 그 무관함이 이 영화의 가장 조용한 반박이다. 마부 부녀에게 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도 감자를 삶아야 하고 말을 돌봐야 한다. 그 일상이 이 영화의 전부이고 그 전부가 이 영화의 깊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6일째 날이 가장 충격적이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이 영화가 말하려 한 모든 것을 담는다. 그 담음이 말이 아니라 어둠으로 온다는 것, 그게 이 영화다. 마부 부녀는 어두워진 세계 안에서도 그냥 앉아있다. 도망치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 앉아있음이 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가 된다. 그 이미지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는다. 인간이 종말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그 앉아있음 외에 없다는 것, 이 영화가 그것을 가장 조용하게 말한다. 창세기의 창조가 6일 동안 빛에서 시작했다면, 이 영화의 6일은 어둠으로 끝난다. 그 역전이 이 영화의 구조이고 동시에 이 영화가 세계에 대해 하는 말이다. 신이 만든 것이 6일 만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영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 보여줌이 말이 아니라 어둠으로 온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가장 영화적이다. 영화가 어둠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마지막 선택이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로 마무리한 것
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 감독의 마지막 영화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그만뒀다.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이 영화를 보면 이해된다. 이 영화는 끝에 대한 영화다. 6일간의 끝, 마부 부녀의 삶의 끝, 그리고 감독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끝이 이 영화 안에서 겹쳐진다. 그 겹침이 이 영화를 단순한 예술 영화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잇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벨라 타르가 이 마지막 영화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방식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진다. 화려함이 없다. 설명이 없다. 그냥 존재한다. 그 존재가 이 영화의 전부다. 이동진 평론가가 여전히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이유가 이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영화가 이렇게 최소한의 것으로 이 정도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증명하는 것이다. 마부 부녀의 삶은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그 특별하지 않음이 이 영화에서 가장 특별해진다. 벨라 타르 감독이 평생 이 지점을 향해 왔다는 것, 그리고 이 마지막 영화에서 그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토리노의 말은 쉬운 영화가 아니다. 2시간 34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쌓이면서 이 영화가 완성된다. 그 완성의 순간이 이 영화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전달된다. 보고 나서 한동안 이 부녀와 이 말과 이 바람이 생각난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유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해된다. 이 영화가 영화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끝이라는 것, 그게 감독이 이 영화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 마무리가 아름답고 무겁다. 토리노의 말을 경험했다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본 사람이 가진 것이다. 보기 어렵지만 보고 나면 다른 영화들이 다르게 보인다. 이 영화를 기준으로 다른 영화들을 보게 된다. 그게 위대한 영화가 하는 일이다. 토리노의 말이 그 일을 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과 후가 다르다면, 이 영화가 제대로 전달된 것이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로 영화를 끝낸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라는 말이 이 영화를 보면 이해된다. 그 완성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