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토리노의 말, 6일간의 종말

by 멋진엄마 2026. 6. 29.

토리노의 말 포스터
토리노의 말 포스터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2011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감독의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철학자 니체가 마부로부터 채찍질당하는 말을 붙잡고 울었다는 일화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니체가 아니라 그 일화에 등장한 말과 마부 그리고 마부의 딸이다. 6일간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역순으로 펼쳐지듯 진행된다. 이동진 평론가가 별 다섯 개를 주면서 여전히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영화다. 이 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적은 것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말하는지, 반복이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벨라 타르가 이 영화로 무엇을 마무리했는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타르코프스키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 헝가리 감독의 은퇴작이 이런 영화라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은퇴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완전히 옳았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벨라 타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토리노의 말, 반복이 말하는 것

토리노의 말에서 마부 부녀의 하루는 거의 같다. 아침에 일어나 술을 마신다. 우물에서 물을 떠온다. 감자를 삶아 먹는다. 말을 돌본다. 잠에 든다. 이 반복이 6일에 걸쳐 이어진다. 그런데 그 반복이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말이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우물이 마른다. 바람이 거세진다. 불이 꺼진다. 빛이 사라진다. 이 미세한 변화들이 이 영화의 드라마다. 벨라 타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대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화면이 두 사람의 일상을 그냥 따라간다. 그 따라감이 이 영화에서 관객을 이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미하이 비그의 음악이 이 영화 전체에 걸쳐 같은 주제를 반복한다. 그 음악이 이 영화의 공기다. 숨 막히고 아름다운 그 공기 안에서 이 부녀가 살아간다. 이 음악이 이 영화에서 대사를 대신한다. 말이 필요 없는 이유가 이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이 영화의 시간이 쌓인다. 그 쌓임이 이 영화의 감각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딸이 감자를 손으로 집어 먹는 장면이 가장 오래 남는다. 아무 말 없이 뜨거운 감자를 천천히 먹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다. 삶이 이 장면 하나에 담겨 있다. 살기 위해 먹는다. 먹기 위해 산다. 그 순환이 이 영화의 전부이고 동시에 이 영화가 말하는 모든 것이다. 벨라 타르의 롱테이크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적 선택이다. 한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관객은 이 부녀의 삶 안에 함께 있게 된다. 그 함께 있음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특별한 경험이다. 대사도 없고 사건도 없지만 무언가가 전달된다. 그 전달이 이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로 가능한 가장 순수한 경험임을 이 영화가 증명한다. 벨라 타르의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매우 도전적이다. 그런데 그 도전을 견디고 나면 이 영화가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받은 사람만이 이 영화가 왜 위대한지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대함이 화려함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가 보여준다. 가장 적은 것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방식, 그게 벨라 타르 영화의 언어다. 이 언어를 배우는 데 이 영화가 필요하다.

6일이 의미하는 것

토리노의 말의 6일 구조가 창세기의 역순이라는 해석이 있다.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6일 동안 세상이 끝나간다. 빛이 꺼지고, 물이 사라지고, 불이 꺼진다. 이 역전이 이 영화를 묵시록처럼 읽히게 만드는 이유다. 그런데 벨라 타르 감독 자신은 이 영화가 묵시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이 영화 안에서 동시에 가능하다. 일상이 종말일 수 있고, 종말이 일상일 수 있다. 마부 부녀에게 이 6일이 세상의 끝인지, 아니면 그냥 살아온 방식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 모호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다. 니체의 일화로 시작하지만 이 영화에서 니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무너진 자리에서, 아무것도 아닌 마부와 딸이 그냥 산다. 그 살아감이 어떤 철학보다 더 무겁다는 것,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철학자 옆에서 신과 무관하게 감자를 먹는 사람들. 그 무관함이 이 영화의 가장 조용한 반박이다. 마부 부녀에게 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도 감자를 삶아야 하고 말을 돌봐야 한다. 그 일상이 이 영화의 전부이고 그 전부가 이 영화의 깊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6일째 날이 가장 충격적이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이 영화가 말하려 한 모든 것을 담는다. 그 담음이 말이 아니라 어둠으로 온다는 것, 그게 이 영화다. 마부 부녀는 어두워진 세계 안에서도 그냥 앉아있다. 도망치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 앉아있음이 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가 된다. 그 이미지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는다. 인간이 종말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그 앉아있음 외에 없다는 것, 이 영화가 그것을 가장 조용하게 말한다. 창세기의 창조가 6일 동안 빛에서 시작했다면, 이 영화의 6일은 어둠으로 끝난다. 그 역전이 이 영화의 구조이고 동시에 이 영화가 세계에 대해 하는 말이다. 신이 만든 것이 6일 만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영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 보여줌이 말이 아니라 어둠으로 온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가장 영화적이다. 영화가 어둠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마지막 선택이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로 마무리한 것

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 감독의 마지막 영화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그만뒀다.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이 영화를 보면 이해된다. 이 영화는 끝에 대한 영화다. 6일간의 끝, 마부 부녀의 삶의 끝, 그리고 감독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끝이 이 영화 안에서 겹쳐진다. 그 겹침이 이 영화를 단순한 예술 영화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잇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벨라 타르가 이 마지막 영화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방식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진다. 화려함이 없다. 설명이 없다. 그냥 존재한다. 그 존재가 이 영화의 전부다. 이동진 평론가가 여전히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이유가 이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영화가 이렇게 최소한의 것으로 이 정도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증명하는 것이다. 마부 부녀의 삶은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그 특별하지 않음이 이 영화에서 가장 특별해진다. 벨라 타르 감독이 평생 이 지점을 향해 왔다는 것, 그리고 이 마지막 영화에서 그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토리노의 말은 쉬운 영화가 아니다. 2시간 34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쌓이면서 이 영화가 완성된다. 그 완성의 순간이 이 영화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전달된다. 보고 나서 한동안 이 부녀와 이 말과 이 바람이 생각난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유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해된다. 이 영화가 영화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끝이라는 것, 그게 감독이 이 영화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 마무리가 아름답고 무겁다. 토리노의 말을 경험했다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본 사람이 가진 것이다. 보기 어렵지만 보고 나면 다른 영화들이 다르게 보인다. 이 영화를 기준으로 다른 영화들을 보게 된다. 그게 위대한 영화가 하는 일이다. 토리노의 말이 그 일을 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과 후가 다르다면, 이 영화가 제대로 전달된 것이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로 영화를 끝낸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라는 말이 이 영화를 보면 이해된다. 그 완성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진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