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아이다는 2015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1960년대 폴란드를 배경으로 수녀가 되려던 소녀 안나가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흑백 화면과 4대 3 화면 비율이라는 파격적인 형식 선택, 침묵이 말을 대신하는 연출 방식,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어떻게 한 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지를 이 영화는 80분 안에 담아낸다. 아이다의 형식이 왜 이 이야기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지, 두 여성의 대비가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왜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8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이토록 많은 것을 담아낸 영화가 흔치 않다. 형식과 내용이 하나로 완벽하게 맞물린 영화를 찾는다면 아이다를 먼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묵과 흑백과 여백이 어떻게 가장 강렬한 언어가 될 수 있는지, 아이다가 그 답을 보여준다. 말이 없을수록 더 많이 남는 영화, 그게 아이다다. 침묵이 이 정도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경험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선물이다.
아이다, 흑백과 침묵이 선택된 이유
아이다를 처음 보면 형식부터 눈에 들어온다. 흑백 화면, 4대34대 3 화면 비율, 그리고 대사가 거의 없는 조용한 연출. 이 선택들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형식이 이 이야기에 얼마나 정확하게 맞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흑백은 이 영화가 다루는 시대와 주제에 어울리는 선택이다. 1960년대 폴란드라는 시대, 홀로코스트의 기억이라는 무게. 그 무게를 색채로 표현했다면 오히려 가벼워졌을 것이다. 흑백이 주는 무거움과 절제가 이 이야기에 필요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4대 3 화면 비율도 단순한 복고적 선택이 아니다. 이 비율 안에서 인물들은 화면 아래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머리 위로 넓은 공간이 남는다. 그 위의 공간이 이 영화에서 하늘처럼 기능한다. 신을 향해 열려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역사의 무게가 눌러오는 공간이기도 하다. 화면 구성 하나가 이렇게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가 흔하지 않다. 이 영화가 4대 3을 선택한 이유를 알고 나면, 처음 화면을 봤을 때의 낯섦이 이해로 바뀐다. 그 이해가 오는 순간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다. 침묵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안나가 자신의 혈통을 알게 되는 장면, 죽은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그 순간들에서 카메라는 안나의 얼굴을 오래 담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형식이 내용과 이렇게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생각한다. 흑백과 침묵이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과 완전히 맞물려 있다. 형식이 내용이 되는 영화, 아이다가 그 기준을 만든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다른 영화를 볼 때도 형식의 선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왜 이 영화는 흑백인가, 왜 이 화면 비율인가를 묻게 된다. 그 질문이 아이다를 보고 나서 생기는 가장 좋은 부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경험, 아이다가 그것을 준다. 그게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끝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보면 처음에 놓쳤던 화면 구성과 침묵의 의미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안 나와 완다, 두 여성의 대비
아이다에서 두 주인공의 대비가 이 영화의 드라마를 만드는 핵심이다. 안나는 수녀원에서 자란 조용하고 신앙이 깊은 소녀다. 세상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심도 없다. 반면 완다는 판사이자 전직 공산당 간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봤고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술을 마시고, 남자를 만나고,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그 대비가 이 영화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신앙과 냉소, 순수와 경험, 침묵과 말. 이 두 사람이 함께 여행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건드린다. 완다는 안나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이 이다라는 것, 부모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순간부터 안나는 이다가 된다. 아니, 안나이면서 동시에 이다가 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가 갑자기 복잡해지는 경험이다. 그 복잡함을 안나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완다에게 어떤 것이 생기는지를 이 영화는 말없이 담아낸다. 두 사람의 여정이 결국 서로를 어떻게 바꾸는지가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이 전달된다. 완다가 이 과정에서 안나에게 하는 행동들이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을 알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다 자신도 그 역사의 무게 아래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완다라는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그 냉소 아래에 오랫동안 혼자 감당해 온 슬픔이 있다. 그 슬픔이 한 번씩 표면으로 올라오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프다. 두 여성의 여정이 서로에게 어떤 것을 남기는지, 이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방식이 이 영화의 결론이다. 완다가 안나에게 준 것이 고통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안나가 완다에게 준 것도 그냥 불편함만이 아니었다는 것. 두 사람이 서로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마지막 장면이 보여준다. 그 교환이 이 영화가 두 여성 모두의 이야기인 이유다. 제목이 아이다인 이유, 안나가 아니라 이다라는 이름이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도 이 두 사람의 여정을 모두 담아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이 오래 남는 이유
아이다의 마지막 장면은 안나가 수녀원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 걸음이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완다의 죽음 이후, 안나는 완다의 삶을 한번 살아본다.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뒤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이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 영화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신앙으로의 귀환인가, 아니면 현실에서의 도피인가. 아니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뒤 더 확실한 선택으로서의 귀환인가. 이 영화는 그 해석을 관객에게 열어두고 끝난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은 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안나가 걸어가는 그 모습만 있다. 그 걸음이 가벼운지 무거운지도 알 수 없다. 그 모호함이 이 장면을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을 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이 여정의 의미를 완성하게 하는 방식. 안나가 다시 수녀원으로 걸어가는 그 길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얹어서 다르게 읽는다. 아이다는 8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홀로코스트의 역사, 신앙과 정체성, 그리고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담아낸다. 그 밀도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한동안 말을 잃게 만드는 이유다. 말이 없는 영화를 보고 나서 말을 잃는 아이러니, 그게 이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받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다. 80분이라는 시간이 이 영화에서 충분하다는 것, 더 길 필요가 없다는 것.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덜어낸 영화가 어떤 감각을 만드는지를 아이다가 보여준다. 덜어냄이 부족함이 아니라 완성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영화가 그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증명한다. 아이다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80분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지를 직접 경험해 보길 권한다. 그리고 보고 난 뒤에 그 마지막 걸음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한동안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