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몬스터는 2023년 칸 영화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으로, 같은 사건을 세 개의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구조를 가진다. 어머니의 시점, 교사의 시점, 그리고 아이들의 시점. 각각의 시점이 끝날 때마다 이전에 악인처럼 보이던 인물이 다르게 보이고,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흔들린다. 세 개의 시점이 진실을 어떻게 다르게 구성하는지, 이 영화가 몬스터라는 단어를 어떻게 뒤집는지, 그리고 두 아이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 왜 가장 오래 남는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보고 난 뒤 처음 장면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몬스터를 지금부터 풀어본다. 같은 사건인데 세 번 모두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는 경험, 그 경험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독특한 감각이다. 판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세 개의 시점으로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답 대신 경험을 준다. 그게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다. 같은 사건이 어떻게 세 개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직접 경험하는 것 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는 영화다.
몬스터, 세 번 보아야 보이는 것
몬스터의 구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현대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해지지만, 그 방식은 훨씬 섬세하다. 라쇼몽이 같은 사건에 대한 네 가지 모순된 증언을 병렬로 놓는다면, 몬스터는 세 개의 시점을 순서대로 쌓아 올리면서 매번 앞에서 본 것을 다시 읽게 만든다. 첫 번째 시점은 어머니 사오리의 것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담임교사 호리는 아이를 폭행하는 가해자다. 그 시점 안에서 사오리의 판단은 완전히 합리적이고, 호리는 분명히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번째 시점이 시작되면서 같은 장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호리의 시점에서 그는 악의 없는 실수를 한 사람이고, 학교 시스템이라는 구조 안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막힌 사람이다. 이 전환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누군가를 나쁘다고 확신했던 순간이 다른 정보 하나로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 그 경험이 관객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두 번째 시점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미 호리를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었는데, 그 판단이 흔들리는 불편함. 내가 얼마나 빠르게 판단했는지를 깨닫는 불편함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가하는 가장 영리한 장치다. 그 불편함이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유익한 이유는, 이 영화가 그 판단의 오류를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보여줄 뿐이다. 관객이 스스로 깨닫게 둔다. 세 번째 시점인 아이들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까지 진짜 몬스터가 누구인지를 계속 바꾸면서, 이 영화는 결국 몬스터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한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고, 악인은 처음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세 번의 시점이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같은 사건을 세 번 보는데 매번 다른 감정이 올라온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효과다. 첫 번째 시점이 끝나고 두 번째 시점이 시작될 때의 그 전환이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나는 평소에 얼마나 빠르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이 영화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방식이 폭력적이지 않고 정확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몬스터라는 단어가 뒤집히는 순간
이 영화에서 몬스터는 처음에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사오리가 아들 미나토에게 몬스터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들은 교사를 가리킨다. 그 순간 관객도 교사가 몬스터라는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몬스터라는 단어가 점점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두 번째 시점에서는 학교 시스템이 몬스터처럼 보인다. 교장이 대표하는 제도적 무감각, 진실보다 체면을 앞세우는 집단의 논리. 세 번째 시점에 이르면 몬스터가 누구인지보다 무엇이 사람을 몬스터로 만드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두 아이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에게 몬스터 게임을 한다. 인간의 뇌를 돼지의 뇌와 바꿔치기당하면 몬스터가 된다는 설정의 게임이다. 이 게임이 단순한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영화 후반에 가서야 이해하게 된다. 미나토와 요리에게 몬스터는 자기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개인적으로 이 몬스터 게임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몬스터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 질문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진짜 핵심이다. 누군가를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자신의 두려움을 외부에 투영하는 행위라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 사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담아낸다. 몬스터라는 단어가 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많은 방향을 가리키는지, 보면 볼수록 그 층위가 더 깊어진다. 처음에는 교사가 몬스터였다가, 다음에는 제도가 몬스터였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몬스터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몬스터였다. 그 이동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가장 천천히 스며드는 충격이다. 몬스터라고 불린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그리고 누군가를 몬스터라고 부른다는 것이 사실은 어떤 행위인지를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오래 생각하게 된다.
두 아이의 이야기가 가장 오래 남는 이유
몬스터의 세 번째 시점, 두 아이 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순간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된다. 앞의 두 시점이 사건을 둘러싼 어른들의 관점이었다면, 세 번째 시점은 그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던 아이들의 내면이다. 미나토와 요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 폐차된 기차 안에서 둘만이 공유하는 공간, 그 공간 안에서 나누는 말들과 침묵. 이 장면들이 앞선 두 시점의 모든 긴장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두 아이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어른들이 정의한 어떤 카테고리도 이 두 아이 사이에는 없다. 요리가 미나토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것, 그 감정이 이 세상에서 이상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불안을 두 아이가 함께 안고 있다는 것. 그 공유가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고 동시에 가장 슬픈 부분이다. 그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정확히 짚어내기 어려운 이유는, 이 두 아이가 겪는 것이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상한 것은 아닐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불안. 그 불안 앞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장면들을 설명하지 않는다. 두 아이의 표정과 움직임과 침묵이 말하게 둔다. 그 방식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 폐기된 기차 안에서 두 아이가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어떤 판단도 없이 그냥 함께 있는 것. 그 단순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두 아이가 달려 나가는 마지막 장면의 빛이 이 영화를 끝내는 방식, 그 빛이 모든 것을 말한다.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그 감각, 그게 몬스터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른들의 세계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강요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내는 세계가 때로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지도. 몬스터를 보고 난 뒤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이 어른들의 갈등이 아니라 두 아이의 빛이라는 것, 그게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기는 가장 정확한 메시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이 작품이 특별히 오래 남는 이유가 그 마지막 빛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