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 에버딩 미주리는 201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가 미해결 사건에 대한 분노를 세 개의 광고판에 새기는 이야기를 담는다.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연기하는 밀드레드, 우디 해럴슨이 연기하는 경찰서장 윌러비, 샘 록웰이 연기하는 문제 경관 딕슨.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이 영화의 드라마를 만든다. 분노라는 감정이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는지, 용서와 변화가 이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지는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왜 이 영화의 전부인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 그게 쓰리 빌보드다. 웃기면서 슬프고, 불편하면서 공감되고, 명확한 답 없이 끝나는 이 영화가 왜 오래 남는지를 함께 풀어본다. 마틴 맥도나 감독이 인 브루주와 세븐 사이코패스에 이어 완성한 세 번째 걸작이다. 이 감독의 영화에 처음 입문한다면 쓰리 빌보드부터 시작하기를 권한다. 가장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가장 깊다. 그리고 가장 오래 따라온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해당되는 영화가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하면, 쓰리 빌보드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알게 된다.
쓰리 빌보드, 분노가 움직이는 방식
쓰리 빌보드에서 밀드레드의 분노는 이 영화의 엔진이다. 딸이 강간 살해당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수사를 사실상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밀드레드는 그 무력함 앞에서 가장 큰 소리로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이 마을 외곽 도로의 세 개의 광고판이다. 거기에 경찰서장의 이름을 직접 명시하면서 수사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건다. 이 행동이 마을 전체를 술렁이게 만든다.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연기가 이 분노를 단순한 피해자의 감정이 아닌 무언가로 만든다. 밀드레드는 약하지 않다.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맞선다. 그런데 그 맞섬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가 밀드레드를 복잡한 인물로 만드는 이유다. 분노는 에너지를 주지만, 그 에너지의 방향을 통제하기 어렵다. 밀드레드가 그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밀드레드가 치과 의사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에서 웃음과 충격이 동시에 온다. 그 동시성이 이 영화가 분노를 다루는 독특한 방식이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진짜 슬픔이 흘러나오는 것, 스리 빌보드가 그것을 가장 능숙하게 해내는 영화다. 블랙코미디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거운 이야기가 이렇게 웃길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경험의 핵심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정확하다. 그 정확함이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당연했다는 생각이 드는 연기다. 밀드레드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옳은 이유로 싸우지만 그 싸움의 방식이 항상 옳지 않다. 그 복잡함이 이 인물을 단순한 피해자 서사에서 꺼내서 훨씬 더 풍부한 드라마의 중심으로 만든다.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이 복잡함을 한 인물 안에서 모두 담아낸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다. 이 연기를 보고 나면 밀드레드가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판단하기 전에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그 이해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먼저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 이후에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이 영화가 답을 주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윌러비와 딕슨이 이 영화에서 하는 것
쓰리 빌보드에서 밀드레드 외에 두 남성 인물이 이 영화의 깊이를 만든다. 경찰서장 윌러비는 밀드레드의 공격 대상이지만, 이 영화는 그를 단순한 악당으로 그리지 않는다. 우디 해럴슨이 연기하는 윌러비는 실제로 딸의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상태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밀드레드의 광고판이 등장하는 상황, 그 아이러니가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을 만드는 지점이다. 샘 록웰이 연기하는 딕슨은 처음에 이 영화에서 가장 보기 싫은 인물이다.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이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서 이 인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이동이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폭력적인 인물이 선의를 보인다는 것이 쉽게 용납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선의도 이 인물을 정당화하지 못하는가.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딕슨의 변화가 진짜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샘 록웰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이 논쟁적이었던 이유가 이 인물 자체가 그렇게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편함을 연기해 낸 것이 수상이었지만, 그 불편함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함께 왔다. 그 질문 자체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것의 일부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 세 인물 모두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도 좋은 면이 있고, 좋은 사람도 나쁜 면이 있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다. 그 중간이 불편하다는 것, 그 불편함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다. 이 영화에서 완전한 악인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무거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모두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그게 이 영화가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그 어려움이 이 영화를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딕슨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그 감정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 다름이 대화를 만들고, 그 대화가 이 영화를 계속 살아있게 한다.
마지막 장면이 답하지 않는 것들
쓰리 빌보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 한다. 그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그들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화로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그 결정이 실행되는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이 열린 결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용감한 선택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 영화 내내 어떤 것도 쉽게 결론짓지 않는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용서가 완성되지 않는다. 분노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미완성들이 모여서 이 영화를 완성한다. 삶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깔끔한 해결은 없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불완전한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윌러비가 죽기 전에 밀드레드에게 남긴 편지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무거운 순간이다. 그 편지가 밀드레드에게, 그리고 딕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영화 후반부의 감정을 만든다.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 그 방향이 예상 밖이라는 것. 개인적으로 이 편지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편지가 있어야 마지막 장면이 가능하다. 마지막 장면이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이 편지부터 시작된 긴 흐름의 끝이라는 것.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차 안의 두 사람을 생각했다.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그리고 그 끝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게 될지를. 그 생각이 오래 이어진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증거다. 쓰리 빌보드는 분노에 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분노가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영화다. 분노가 광고판을 세울 수는 있지만 딸을 돌려줄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이 영화는 끝까지 직시한다. 그 직시가 이 영화를 단순한 복수극이나 정의 실현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분노 이후에 무엇이 남는가, 쓰리 빌보드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깊이 그 질문을 남긴다.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그 광고판이 생각난다. 세 개의 광고판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지 못했는지. 그 모든 것이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쓰리 빌보드를 보고 나서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면, 그게 이 영화가 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