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2017년 더 스퀘어로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5년 만에 슬픔의 삼각형으로 다시 같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두 번 받는 건 영화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이 영화가 심사위원들에게 강렬하게 다가갔다는 뜻인데, 실제로 보고 나면 왜 그런지 납득이 됩니다. 패션모델 커플, 초호화 크루즈, 억만장자들, 그리고 무인도. 이 낯선 조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불편하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역겹기까지 하지만,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봅니다.
슬픔의 삼각형이 칸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밖에 없던 이유
슬픔의 삼각형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뉩니다. 패션 업계를 배경으로 한 커플의 일상, 초호화 크루즈에서의 파티, 그리고 무인도 생존. 각 파트는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지만 세 파트가 이어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돈과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외스틀룬드는 이 질문을 직접 던지는 대신 상황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답하게 만듭니다. 크루즈 파트의 선장 만찬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배 전체가 흔들리고,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쏟아지고, 억만장자 승객들은 하나둘 구토를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닙니다. 문명과 예절이라는 얇은 껍데기가 물리적 혼란 앞에서 얼마나 빠르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외스틀룬드는 이 장면을 지나치게 길게 끌면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그 불편함이 바로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감각입니다. 칸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를 선택한 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 연출의 용기를 알아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크루즈 파트를 보면서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저 장면을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싶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촬영 내내 배를 흔들며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진짜 멀미를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그 고생이 다 화면에 담긴 거였습니다. 연출의 극단성이 설정이 아닌 현실로 느껴졌던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금종려상이 이 영화에 간 건 그 집요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권력이 뒤집히는 순간, 영화가 하고 싶은 말
슬픔의 삼각형에서 가장 영리한 설정은 무인도 파트입니다. 크루즈가 침몰하고 생존자들이 섬에 고립되자, 지금까지 권력의 최하층이었던 청소부 아비게일이 갑자기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잡고,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섬에서는 왕이 됩니다. 억만장자도, 유명 모델도, 무기 상인도 그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외스틀룬드는 이 역전 구도를 통해 계급이 얼마나 맥락에 의존하는 개념인지를 보여줍니다. 문명사회에서 통용되던 권력의 언어가 맥락이 바뀌는 순간 완전히 무력해집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한 계급 역전 판타지로 끝나지 않는 건, 아비게일 역시 손에 쥔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권력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걸 보여주되, 어느 한쪽을 영웅화하지 않는 시선이 이 영화를 더 날카롭게 만듭니다. 이 파트를 보면서 계급이라는 게 결국 누가 필요한 사람인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루즈에서 서빙을 하던 사람이 섬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설정이 처음엔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졌는데, 보다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게 여기는 계급의 기준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실감하는 순간이 됐습니다. 외스틀룬드가 이 장치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됐습니다.
결말이 끝나지 않는 영화의 여운
슬픔의 삼각형의 결말은 열려 있습니다. 구조될 기회가 생긴 순간, 아비게일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화면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주인공 야야를 향해 달려가는 아비게일의 뒷모습을 잡고 그대로 멈춥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비게일이 무엇을 했는지 관객은 알 수 없습니다. 이 열린 결말은 아나토미 오브 어 폴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남깁니다. 권력을 쥔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구조라는 기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이 질문들은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게 됩니다. 외스틀룬드가 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는 건 사회 구조에 대한 냉소적 시선입니다. 희망도 없고, 교훈도 없습니다. 그냥 이게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걸 보여줄 뿐입니다. 그 냉소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 스스로도 그 구조 안에서 누군가의 위에, 또 누군가의 아래에 서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는 그 불편함을 직접 건드립니다. 결말 장면 이후 화면이 암전 되는 그 순간에 옆에 있던 사람이랑 눈을 마주쳤는데, 둘 다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뭘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침묵이 이 영화가 남긴 가장 정직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의 기준이 뭔지 늘 헷갈리는데, 보고 나서 말이 안 나오는 영화라면 그냥 좋은 영화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슬픔의 삼각형이 딱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