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2018년 칸 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과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심사위원회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이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유재건, 전종서, 스티븐 연이 각각 종수, 해미, 벤을 연기한다. 한 청년이 만나는 두 종류의 세계, 그 세계 사이에서 사라지는 여자. 이 영화가 무엇을 태우는지, 벤이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이 영화가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 이유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로튼토마토 100%를 기록하며 2018년 비평가들이 가장 극찬한 영화 중 하나로 꼽혔다.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영화라는 사실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느껴진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시에 이은 이창동의 다섯 번째 장편이 이 영화이며, 그 모든 이전 작품들의 깊이가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깊이가 이 영화를 단순한 미스터리 영화 이상으로 만드는 이유다.
버닝,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세계
버닝에서 종수와 벤은 같은 세계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산다. 종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소설 쓰기를 꿈꾸는 청년이다. 아버지는 재판 중이고, 집은 낡았고, 미래는 불분명하다. 벤은 판교에 살고, 포르셰를 몰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사람이 해미를 통해 만난다. 이창동 감독은 이 만남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계층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가장 예리하게 담아낸다. 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이 영화에서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 불명확함이 이 영화에서 벤이라는 인물의 핵심이다. 설명되지 않는 부유함, 근거를 알 수 없는 여유. 그것이 종수에게 불안과 분노를 동시에 만든다. 아프리카에서 온 해미가 두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불안하다. 그 아름다움 안에 이미 무언가 잘못될 것이라는 예감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해질 무렵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가장 오래 남는다. 전종서가 춤을 추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 아름다움이 끝나고 나서 이 영화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가 빛에서 어둠으로 이동하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구조다. 처음의 밝음이 나중의 어둠을 더 무겁게 만든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빛과 어둠이 항상 서로를 필요로 했다는 것, 버닝에서 그 관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종서의 춤이 빛이라면, 그 이후의 모든 것이 어둠이다. 그 대비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잊히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가 느끼는 분노와 무력감이 이 영화에서 종수라는 인물을 통해 담긴다. 그 감정이 이 영화를 보는 많은 한국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다. 종수의 무력함이 보편적인 무력함으로 읽히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취다. 한국 이야기이지만 어디서나 통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영화가 칸에서 외국 관객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울렸던 이유가 바로 이 보편성이다. 계층의 문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가 어느 사회에나 있다.
벤이라는 인물이 말하는 것
버닝에서 벤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다. 스티븐 연이 연기하는 벤은 항상 웃고 있다. 그 웃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친절한 것인지, 경멸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의 표정인지. 벤이 종수에게 말한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두 달에 한 번씩. 그냥 태운다고. 이 고백이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대사다.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더 무섭다. 그 고백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벤이 실제로 무엇을 태우는지가 이 영화에서 끝까지 명확하지 않다. 그 모호함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쌓이고, 해미가 사라지고 난 후 그 모호함이 공포가 된다. 스티븐 연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그 표정이 이 영화의 벤을 완성한다.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에서 알려진 이 배우가 이 영화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칸이 이 배우를 주목한 것이 당연하다. 이 영화가 스티븐 연에게도 새로운 시작점이 됐다는 것, 이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벤이 등장할 때마다 화면의 온도가 달라진다고 느꼈다. 그 달라짐이 이 배우가 이 역할에서 하는 일이다. 존재감만으로 공포를 만드는 방식, 이 영화가 그것을 완성한다. 벤이 고양이를 키우지만 그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세부 설정이 이 영화의 모호함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벤의 과거, 해미의 현재, 그리고 이 영화의 미래. 모두 보이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이 이 보이지 않음을 어떻게 화면 안에 담는지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연출이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느끼게 하는 것, 이 영화가 그것을 가장 정밀하게 한다. 해미의 고양이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게 만드는 방식, 그게 이 영화에서 가장 섬세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종수가 고양이를 부르는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쓸쓸한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부르는 것,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답을 주지 않는 이유
버닝은 해미가 사라진 이유를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벤이 범인인지 아닌지도 말하지 않는다. 그 미해결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다.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에서 답을 주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질문이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미의 실종이 묻는 것은 가난한 사람,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 사라졌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 가다. 아무도 해미를 진지하게 찾지 않는다. 경찰도, 주변 사람도. 오직 종수만이 그녀를 찾으려 한다. 그 외로움이 이 영화의 가장 무거운 부분이다. 가난한 사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사라졌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영화가 그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묻는다. 그 질문이 한국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를 세계적으로 울리게 만든 이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이 미스터리로 끝났다면, 이창동 감독은 그 미스터리를 사회적 질문으로 전환했다. 그 전환이 버닝을 단순한 원작의 영화화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영화로 만든다. 유재건의 연기도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분노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청년, 그 억압된 감정이 영화 전체에 걸쳐 쌓이다가 마지막에 폭발한다. 그 폭발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개인적으로 버닝을 보고 나서 한동안 이 영화가 무엇을 태웠는지를 생각했다. 비닐하우스인지, 해미인지, 아니면 종수의 무언가인지. 그 생각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남는 이유다.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만든 영화, 그 기다림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는 카메라,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장면들, 그 모든 것이 이 감독이 오래 기다리고 생각한 흔적이다. 버닝은 빨리 보는 영화가 아니다. 천천히, 이 영화의 공기 안에 앉아야 하는 영화다. 그 앉음이 이 영화를 경험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끝나고 나서 이 영화가 무엇을 태웠는지를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이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더 무겁고 더 한국적이며 더 정치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 평가에 동의한다. 이창동이 이 원작을 선택한 이유가 이 영화를 보면 이해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하루키의 원작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두 버전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 그게 이 영화와 원작의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