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 아스테로이드 시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갈수록 스타일이 짙어지고 구조가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진입 장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작품이 2012년작 문라이즈 킹덤입니다. 앤더슨 특유의 세계관이 가장 깔끔하게, 그리고 가장 따뜻하게 담겨 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 영화가 입문작으로 적합한지와 아이들 이야기 속 어른의 고독이 담긴 방식, 향수라는 감각이 현재를 감싸는 방식 세 가지로 정리해봤습니다.
문라이즈 킹덤, 웨스 앤더슨 입문작으로 추천하는 이유
문라이즈 킹덤은 1965년 뉴잉글랜드의 작은 섬을 배경으로 열두 살 소년 샘과 소녀 수지가 편지를 주고받다 함께 도망치는 이야기입니다. 설정만 들으면 아동 영화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보면 꽤 다층적입니다. 아이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른들의 이야기이고, 모험담이면서 동시에 각자의 고독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입문작으로 좋은 첫 번째 이유는 앤더슨 스타일이 가장 진입하기 쉬운 방식으로 구현돼 있다는 점입니다. 좌우대칭 구도, 파스텔 톤의 색채, 정면 카메라, 미니어처 같은 세트. 이것들이 앤더슨 영화의 시각적 특징인데 문라이즈 킹덤에서는 이 요소들이 동화 같은 섬 배경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이후 작품들처럼 스타일이 전면에 나서서 내용을 압도하는 느낌이 아니라, 이야기를 더 아름답게 감싸주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감정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앤더슨 영화는 종종 냉소적이고 거리감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문라이즈 킹덤은 그 거리감 안에서도 온기가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진지한 사랑이 우스꽝스럽지 않고 진짜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앤더슨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이 감독 영화가 맞나 싶었습니다. 예쁘긴 한데 뭔가 인형의 집 안을 보는 것 같은 거리감이 있었거든요. 근데 문라이즈 킹덤을 보면서 처음으로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샘과 수지가 텐트를 치고 레코드를 틀어 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에서, 이 감독이 왜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만드는지 처음으로 이해됐습니다. 완벽하게 통제된 화면 안에서 가장 통제되지 않는 감정, 열두 살의 첫사랑이 터져 나오는 그 모순이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라는 걸 이 영화로 배웠습니다.
아이들 이야기 속에 어른의 고독이 담긴 방식
문라이즈 킹덤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만큼 중요한 건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수지의 부모는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에게 법적 용어로 말을 겁니다. 두 사람은 이혼 직전의 부부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연결이 끊어진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섬의 경찰관 샤프는 홀로 살면서 수지의 어머니와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샘의 담당 스카우트 대장은 스카우트가 삶의 전부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앤더슨은 이 어른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리지 않습니다.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의 도주가 어른들에게 일종의 충격을 주는 건, 그 두 아이가 어른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어떤 확신을 갖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 어른들은 그 단순한 행위를 어느 시점부터 하지 않게 됩니다.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하는 경찰관 샤프가 마지막에 샘을 도와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순간입니다. 어른으로서 규칙을 따라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이의 선택을 지지하는 그 행동이 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인 줄 알고 봤다가 어른들 장면에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수지 부모의 관계를 보면서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를 생각했는데, 영화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 이 두 사람이 이렇다는 걸 보여줄 뿐입니다. 그 여백이 오히려 더 많은 걸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향수라는 감각이 현재를 감싸는 방식
문라이즈 킹덤은 1965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입니다. 편지를 주고받고, 레코드를 듣고, 지도를 보며 걷습니다. 이 시대 설정이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닌 건, 앤더슨이 이 시대를 통해 무언가 잃어버린 속도를 되살리기 때문입니다. 문라이즈 킹덤 안에서는 일이 천천히 진행됩니다. 편지가 오고 가고, 두 아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걷고 이동합니다. 그 속도가 영화 전체에 독특한 호흡을 만들어줍니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도 이 시대 감각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현악기 중심의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테마는 어딘가 기억 속에서 들은 것 같은 친근함이 있으면서도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감각을 줍니다. 그 음악이 화면과 만나는 방식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합니다. 앤더슨 영화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문라이즈 킹덤이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데스플라의 문라이즈 킹덤 테마를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영화의 특정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통째로 떠오릅니다. 좋은 영화 음악이 하는 일이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의 음악이 정확히 그 역할을 합니다. 웨스 앤더슨 영화를 처음 보는 분에게 문라이즈 킹덤을 권하는 건, 이 영화가 앤더슨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부드러운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을 지나고 나면 그의 다른 영화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