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는 2018년 베니스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촬영상·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흑백 화면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 콜로니아 로마 지구를 배경으로, 중산층 가정과 그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클레오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줍니다. 개봉 당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얼마나 실화냐는 것이었습니다. 쿠아론은 인터뷰마다 이 영화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했다고 밝혔지만, 기억이란 항상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실화와 창작의 경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 실화 vs 창작, 쿠아론이 자전적 이야기를 만든 방식
로마의 주인공 클레오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습니다. 쿠아론 감독이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가정부 리보 로드리게스가 그 원형입니다. 쿠아론은 영화를 만들기 전 리보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그의 기억과 경험을 들었고, 그 내용을 시나리오에 반영했다고 밝혔습니다. 클레오의 임신과 남자친구에게 버림받는 이야기, 병원에서의 출산 장면, 익사 직전의 아이들을 구하는 장면 모두 리보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합니다. 다만 쿠아론은 이 이야기를 자신의 시선, 즉 당시 열 살 안팎이었던 소년의 시선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기억의 주관성이 강하게 개입됩니다. 영화 속 아버지 캐릭터가 가족을 떠나는 장면도 쿠아론 본인의 경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쿠아론의 부모는 실제로 이혼했고, 아버지의 부재가 그의 유년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레오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영화는 동시에 한 가정의 해체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 두 서사가 나란히 흐르면서 서로를 비추는 구조가 이 영화를 단순한 회고록 이상으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클레오와 가족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버림받고 홀로 서는 과정을 겪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계급과 젠더를 가로질러 존재하는 보편적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카메라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클레오의 고통도, 가족의 혼란도 같은 거리에서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 그 집에 살았던 아이가 수십 년 뒤 감독이 돼서 자신이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위,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는 걸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흑백 화면과 기억의 질감이 만들어낸 것
쿠아론이 로마를 흑백으로 촬영한 건 단순히 예술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흑백은 기억의 질감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된 과거를 떠올릴 때 그 장면은 흔히 색이 바랜 것처럼 느껴지고, 윤곽은 선명하지만 세부는 뭉개져 있습니다. 쿠아론은 이 영화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접근했고, 흑백이라는 선택이 그 의도와 맞아떨어졌습니다. 직접 촬영까지 맡은 쿠아론의 카메라는 인물보다 공간과 분위기를 더 많이 담습니다. 카메라는 자주 천천히 패닝 하며 거리 풍경을 보여주고, 인물의 감정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에도 클로즈업보다는 롱숏을 선택합니다. 이 거리감이 영화를 관조적으로 만들고, 동시에 관객에게 생각할 공간을 줍니다. 클레오가 해변에서 파도에 맞서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시퀀스 중 하나입니다. 수영을 못한다고 했던 클레오가 익사 직전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닙니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직후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살리는 클레오의 행위는 비극과 헌신이 동시에 담긴 순간이고, 흑백의 파도가 그 감정을 더 날것으로 전달합니다. 이 장면에서 흑백이 아니었다면 감동이 덜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이 없으니까 오히려 감정에만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컬러였다면 파도의 색깔이나 배경에 신경 쓰였을 텐데, 흑백이니까 클레오의 표정과 움직임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쿠아론이 왜 이 선택을 했는지 해변 장면 하나로 완전히 이해가 됐습니다.
역사적 사건이 영화 안으로 들어온 방식
로마에는 1971년 6월 실제로 일어난 코르푸스 크리스티 학살이 등장합니다. 멕시코 정부가 학생 시위대를 무력 진압한 이 사건은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낳은 역사적 비극인데, 클레오가 아기용품을 사러 나간 날 우연히 이 현장에 휘말리는 장면으로 영화 안에 들어옵니다. 쿠아론은 이 장면을 역사 기록처럼 재현하지 않습니다. 클레오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갑작스럽게 혼란이 밀려오고,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쓰러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관객은 클레오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 혼란 속에 함께 있게 됩니다. 이 연출 방식이 역사 사건을 개인의 경험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역사 교과서가 아닌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겨진 방식으로 그 사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장면은 클레오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가정부이자 원주민 여성인 클레오는 그 혼란 속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합니다. 역사적 폭력이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닿는 건 언제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 장면은 말없이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보고 나서 코르푸스 크리스티 학살을 따로 찾아봤습니다. 영화가 역사 공부의 계기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역사 속으로 끌려들어 간 건 처음이었습니다. 총성이 울리는 장면에서 클레오가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그 몇 초가 유독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