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3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음향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이 수용소 바로 옆 집에서 꽃을 가꾸고 아이들과 웃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다. 홀로코스트를 다루지만 수용소 안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소리로만 전달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 리스트 이후 최고의 홀로코스트 영화라고 평한 이유,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모든 것을 말하는지, 그리고 이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묻는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글레이저 감독의 10년 만의 복귀작이기도 하다. 그 10년의 준비가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느껴진다. 쉬운 영화가 아니지만 봐야 하는 영화라는 것,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그게 이 영화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그 달성이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길 바란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보여주지 않는 공포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수용소 안은 단 한 번도 직접 보이지 않는다. 화면 안에는 정원과 수영장과 꽃밭과 아이들의 웃음이 있다. 그런데 그 화면 너머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들려온다. 총소리, 비명, 연기, 그리고 기차 소리. 그 소리들이 화면에 보이는 평화로운 일상과 겹쳐진다. 이 충돌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공포를 만드는 방식이다.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고 들리게 하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이 영화가 증명한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실제 아우슈비츠 인근에서 촬영했다. 수용소가 실제로 보이는 거리에서, 실제로 그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공간에서 이 가족의 일상을 찍었다. 그 공간적 진실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든다. 아카데미 음향상을 받은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이 그래서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소리가 이야기를 한다. 화면이 말하지 않는 것을 소리가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보다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됐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알면서 화면 위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는 경험이 이 영화가 만드는 가장 특별한 감각이다. 그 감각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일반적인 홀로코스트 영화와 가장 다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쉰들러 리스트가 그 담장 안의 공포를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그 담장 옆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 무감각함이 어쩌면 더 깊은 공포다. 직접적인 폭력보다 그 폭력에 익숙해진 일상이 더 무섭다는 것, 이 영화가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일상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일상은 다른 누군가의 지옥 옆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모른 체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이 영화가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것들과 함께 오래 남는다. 이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따라다니는 것이다.
평범한 악의 얼굴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루돌프 회스 가족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내 헤트비히는 정원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 쓰고, 더 좋은 집을 원한다. 루돌프는 일에 성실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이 평범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악이 특별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일상적인 욕망과 행동 안에 대량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밝힌 것이 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쉽게 감정이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해자와 우리가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보려 했다고. 그 시도가 이 영화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정직한 홀로코스트 영화로 만든다. 헤트비히 가 이웃에게 자신의 정원을 자랑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는 순간이다. 아우슈비츠 담장 바로 옆에서 정원 자랑을 하는 그 일상. 그 일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의 핵심이다. 우리도 어떤 담장 옆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영화가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산드라 휠러가 연기하는 헤트비히 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핵심이다. 그녀는 악한 사람처럼 연기하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어머니이고 아내다. 그 평범함이 공포다. 크리스티안 프리델이 연기하는 루돌프도 마찬가지다. 두 배우가 악의를 숨기는 연기가 아니라 악의 없이 사는 연기를 하는 방식, 그게 이 영화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이 영화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더 무서운 일이다. 그 무감각이 바로 이 영화가 경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어떤 것에 공모하게 되는지,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 질문을 가장 조용하게 던지는 영화다. 조용하기 때문에 더 깊이 박힌다. 이 영화가 큰 소리로 외치지 않기 때문에 그 조용함이 더 오래 남는다. 홀로코스트 영화 중 이렇게 조용한 영화가 이렇게 강렬한 경우가 없었다. 그 조용함이 이 영화의 가장 용감한 선택이다.
이 영화가 지금 말하는 것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과거에 대한 영화이지만 현재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이 영화가 점령과 학살이 계속되는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읽히는지를 직접 언급했다. 그 발언이 논란이 됐지만, 그 논란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와 연결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는 일, 그것을 담장 너머의 일로 치부하면서 일상을 계속하는 방식. 그게 1944년 아우슈비츠 옆 집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게 지금 이 세계 어딘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 영화의 제목이 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이해 관심 구역이라는 말은 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 주변 지역을 가리키던 단어다. 금전적 이득을 위해 설정된 구역. 그 냉정한 명칭 안에 이미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게 1944년 아우슈비츠 옆 집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게 지금 이 세계 어딘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 영화의 제목이 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이해 관심 구역이라는 말은 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 주변 지역을 가리키던 단어다. 금전적 이득을 위해 설정된 구역. 그 냉정한 명칭 안에 이미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인간이 인간을 금전적 이해관계의 대상으로만 보는 순간,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영화가 소리로 들려준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내가 모른 체하고 있는 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이 이 영화가 가장 오래 남기는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가 그 담장 안을 보여줬다면,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담장 밖의 우리를 보여준다. 그 차이가 이 영화를 단순한 역사 영화가 아니게 만드는 이유다. 역사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것을 가장 불편하고 가장 정직하게 말하는 영화다. 보고 나서 쉽게 털어낼 수 없는 영화, 그게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감동을 주지 않는다. 대신 불편함을 준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목적이고, 그 목적이 달성됐다는 것을 보고 나서 알게 된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봤다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경험이 이 영화를 단순한 역사 영화의 범주에서 꺼낸다.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을 바꾸는 영화, 그게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