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래디 코벳 감독의 더 브루탈리스트는 2024년 베네치아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 라슬로 토스가 전후 미국에서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을 지키려 분투하는 이야기를 3시간 30분에 걸쳐 담아낸다. 아드리안 브로디가 연기하는 라슬로는 유럽의 혼돈에서 살아남아 아메리칸드림을 향해 걷지만, 그 꿈이 어떻게 부서지고 변형되는지를 이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보여준다. 꿈이 부서지는 방식, 예술가와 자본이 충돌하는 구조, 그리고 이민자가 새로운 땅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지키려 하는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한다. 3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이 영화에서 단순한 러닝타임이 아니라 라슬로의 삶 자체라는 것, 그 감각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남는다.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2024년 영화다. 3시간 반이 아깝지 않은 영화가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하면, 더 브루탈리스트는 그 드문 목록에 확실히 들어간다. 처음에는 긴 영화라서 망설여지지만, 시작하면 그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더 브루탈리스트, 3시간 반이 필요한 이유
더 브루탈리스트의 러닝타임은 3시간 30분이다.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 시간이 필요한가를 먼저 묻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질문이 바뀐다. 이 시간이 아니면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라슬로가 미국에 도착하는 것부터 자신의 가장 큰 작업을 완성하는 것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이 영화 안에 들어 있다. 그 시간을 압축했다면 라슬로가 어떤 사람인지가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브래디 코벳 감독은 라슬로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빠른 편집으로 요약하는 대신, 그 시간 안에 관객을 함께 앉혀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이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라슬로가 얼마나 오래 기다리는지,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그 기다림의 무게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3시간 반을 보고 나서 관객이 느끼는 그 무게감이 라슬로가 평생 느꼈던 것의 아주 작은 조각이다. 그 작은 조각만으로도 이렇게 무거운데, 라슬로가 실제로 감당했던 무게는 얼마나 됐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인터미션이 연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숨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1부가 끝났을 때의 감정을 혼자 소화할 시간을 주는 것. 그 시간이 2부의 감각을 완전히 바꾼다. 긴 영화라서 지루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리듬이 처음에는 낯설고 나중에는 그 리듬 안에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그 리듬을 경험하기 위해 3시간 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짧은 영화로는 줄 수 없는 무언가가 남는다. 라슬로와 함께 그 시간을 보냈다는 감각, 그게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가장 독특한 경험이다. 긴 영화를 꺼리는 사람에게도 더 브루탈리스트만큼은 그 시간을 써볼 것을 권하고 싶다. 보고 나면 왜 이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스스로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짧았다면 이 영화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이 영화의 서사이자 감각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자본이 충돌하는 방식
더 브루탈리스트에서 라슬로와 해리슨 리 반 뷰렌의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 드라마를 만든다. 해리슨은 부유한 미국인 후원자로, 라슬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건물을 의뢰한다. 처음에는 이 관계가 이상적으로 보인다. 재능 있는 예술가와 그것을 지원할 자본이 만난 것이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해리슨은 라슬로의 예술을 원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호에 맞는 방식으로 구현되기를 원한다. 예술가의 비전과 후원자의 요구가 충돌하는 순간들이 이 영화에서 반복된다. 그 충돌이 처음에는 작은 의견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것이 근본적인 권력관계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드러남이 너무 천천히 와서 더 무섭다. 단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 세계에서도 오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가 그 감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라슬로는 생존을 위해 타협하고, 그 타협이 자신의 예술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이 딜레마가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고 가장 오래 남는 부분이다. 예술이 자본에 의해 어떻게 조형되는지, 예술가가 후원자와 관계를 맺는 순간 어떤 것이 시작되는지를 이 영화는 라슬로의 수십 년을 통해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관계가 지금 이 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플랫폼이나 자본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것을 변형해야 하는 상황, 그 구조가 1950년대 미국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읽으면 훨씬 가까이 느껴진다. 더 브루탈리스트가 지금 이 시대에 만들어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이야기이지만 2024년에 보면 더 선명하게 읽히는 이유, 그게 이 영화가 베네치아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전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과 자본의 관계는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다. 그 불변의 구조를 이 영화가 가장 정직하게 담아낸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예술과 자본의 관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게 이 영화가 현재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동시대적인 이유다.
이민자의 정체성이 버티는 방식
더 브루탈리스트에서 라슬로는 이민자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고, 유럽의 기억을 몸에 새기고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 사람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지키는지를 담는다. 라슬로의 건축 스타일인 브루탈리즘은 장식을 없애고 재료 그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콘크리트가 콘크리트로 보이게, 무게가 무게로 느껴지게. 그 미학이 라슬로 자신과 닮아 있다. 자신을 꾸미거나 다르게 보이게 만들려 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 그런데 미국은 그 방식을 항상 환영하지 않는다. 라슬로의 브루탈리즘이 너무 차갑다, 너무 유럽적이다, 미국적이지 않다는 말을 그는 계속 듣는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이 이 새로운 땅에서 얼마나 어려운지가 이 영화 전체에 흐른다. 아드리안 브로디의 연기는 이 모든 것을 말없이 담아낸다. 라슬로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장면들,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언어의 장벽이 단순한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장면들이 보여준다. 완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언어 안에서도 자신의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게 라슬로이고,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 이민자의 초상이다. 이 초상이 70년 전 이야기인데도 지금 읽히는 이유가 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라슬로가 자신의 건축물 앞에 서는 순간들이 가장 오래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 건물이 자신의 모든 것이고, 그 건물 안에 자신이 누구인지가 담겨 있다. 그 앞에 서는 라슬로의 얼굴에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이 있다.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이 건축 양식이면서 동시에 이 사람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 이중성이 완전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 이중성이 느껴지는 순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이것이었는지가 가장 정확하게 이해된다. 더 브루탈리스트는 라슬로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 보편성이 이 영화를 특정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아드리안 브로디가 이 역할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다.